조선시대 임금이 죽고 나면 실록을 편찬하게 되는데, 그 기초가 바로 사초(史草)이다. 사초란 사관이 그때그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궁궐일지이다.

사초는 임금을 비롯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극비문서로 분류되어 엄격하게 관리된다. 행여 정치적인 보복이나 파쟁의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사관은 사관대로 나름 긍지와 책임감을 갖고 직필(直筆)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이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이어져 내려온 배경이다.

조선시대 첫 사화(士禍)인 무오사화는 사초가 발단이 된다. 연산군 4년 성종의 실록을 펴내기 위해 설치된 실록청의 당상(우두머리) 이극돈은 사초를 미리 살펴본다.

그런데 자신의 비행이 낱낱이 담겨있지 않은가? 이극돈은 당장 사초 작성자인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를 간청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앙심을 품은 이극돈은 사초에 실린 또 다른 내용,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이용할 궁리를 한다.

조의제문은 김일손의 스승이자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로 이름 높은 김종직이 지은 것이다. 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다. 이극돈은 이를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방하는 것으로 뒤집어씌울 작정을 한다.

이극돈은 당시 훈구파의 거두격인 유자광과 모의하고, 곧 바로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이를 일러바친다. 그러잖아도 직간을 주저하지 않는 사림파를 곱게 보지 않던 연산군은 펄펄 뛰며 김일손이 쓴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이에 짜고 치듯이 이극돈은 문제되는 부분만 절취한, 이를테면 ‘발췌본’을 만들어 갖다 바친다. 이 어처구니 없이 조작된 대역죄사건으로 김일손은 능지처참,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된다. 이 밖에 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를 간다. 이극돈도 보고를 늦게 했다는 이유로 파직된다. 간신배가 제 스스로 제 목을 친 셈이다.

NLL발언록을 둘러싼 여야간의 저급한 진흙탕 싸움이 가관이다. 급기야 국가기록원에 발언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성을 상실한 채 마구잡이식 주먹다짐을 하는 형국이다.

언론은 아예 이 부끄러운 사건을 ‘사초게이트’라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여당은 옛날에도 사초와 관련된 죄는 참수형에 처했다고 공격한다. 야당은 무오사화 때 사림파처럼 자신들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고 받아친다.

정말 낯 뜨거운 아전인수식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사초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점에서는 누가 덜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똑 같을 뿐이다. 지금 여당은 검찰수사를 공식 요구하고, 야당은 검찰은 믿을 수 없으니 특검을 도입하자고 한다.

정치로 풀어야 할 일을 툭하면 고소고발에 매달리는 고질병이 또 도진 모양이다. 검찰이든 특검이든 제 아무리 열심히 수사한다 해도 여야 모두 그 결과를 흔쾌하게 승복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여야는 사초게이트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

사과할 사람은 사과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 아울러 다시는 사초를 악용하지 않겠다는 공동선언이라도 해야 한다. 정치는 실종되고 국회는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국민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안상정 / 논설위원

안상정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