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있고, 경제는 어려워지는 미묘한 시기에 상징적인 판결이 나왔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2부는 16일 김승연씨(60·세) 한화그룹 회장에게 징역 4년과 벌금 51억원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법정구속했다. 김 회장이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실을 떠넘겼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그동안 재판을 받은 대기업 총수들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나는 게 공식이라면 공식이었다.

실형을 받더라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명분 아래 법정구속은 면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대기업 총수에 대한 사법의 잣대가 엄격해진 것이다. 판결을 선고한 서경환(46) 부장판사는 "실형선고는 2009년 도입한 양형기준에 따른 것"이라며 "경영 공백이나 경제발전 공로 등은 집행유예를 위한 참작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서 판사는 판결문에 '그룹에선 김 회장이 신의 경지로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이라는 요지의 표현을 삽입하기도 했다. 이번 판결은 세태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대기업과 부자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이 늘고 있다.

재판부에서 예전처럼 구속을 면해주는 판결을 내놓기 어려운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판결은 경기 침체, 경제민주화 등과 맞물려 대기업 총수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이미 올해 초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변화가 감지됐었다.　언제나 그렇듯 민심의 변화에 안테나를 예리하게 세우는 곳은 정치권이다. 여야 막론하고 대기업을 몰아세우면 대선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대선 후보들은 개념이 모호한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선명 경쟁을 하고 있다. 이런 때 김 회장의 재판이 벌어진 것이다. 김 회장과 한화그룹으로선 운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억울할 법도 하다.

당장 김 회장이 지휘해온 태양광사업과 80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사업이 영향을 받지 않을까 우려한다. 총수가 재판을 받고 있는 SK 등 다른 기업들도 김 회장의 판결 소식을 듣고 당황하고 있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한화뿐 아니라 재계 전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세상은 대기업과 부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은 소득 상위 1%가 1970년 전체 소득의 8%를 차지하던 것이 2007년엔 24%로 늘었다.

양극화는 올 미국 대선에서 주요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인들의 64%는 고소득자에게 더 많은 소득세를 물리기를 원하고 있다. 중국에선 지도층의 부패 문제가 잠복해 있다.　유로 위기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서 우리 경제는 올해 3% 성장이 힘겨운 실정이다.

경기 침체와 대선이 겹쳐 대기업과 부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잘못은 벌하되 보여주기식 처벌이나 몰아세우기는 곤란하다"며 "냉정하게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때일수록 이념이나 정치의 잣대가 아닌 사법의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다.


김형곤 / 보도국장 대우

김형곤 / 보도국장 대우